올해 서른 살이 20대를 정리하며 (성공 글 아님 주의)

올해 서른 살이 20대를 정리하며 (성공 글 아님 주의)

이 글을 누가 볼게 될지 모르겠지만 올해 서른이 된 사람 중 한 청년의 20대를 공유해보려 한다.

이 글은 가식과 과장을 제거하고 쓰는 순수한 글이니 편하게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나는 음악을 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아 여기서 부터 나랑 너무 다른 인생인데?라고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성적이 매우 낮아 아침에 필수 영어 수업 ELS를 수료한다는 조건부 입학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학교는 입학이 쉬운 편이었다. 이걸 한국에서는 도피 유학이라고 부른다.)

2011년 나는 고졸 이후 음악이 너무 하고 싶어서 미국음대에 입학하여 나 보다 먼저 음악을 시작한 사람들을 따라잡기 위해 미친 듯이 연습에만 몰두하였다. 영어도 더럽게 못해서 아침에 영어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대학 전공 과정을 밟아 나가고 그렇게 강의가 끝나고 나면 학교 연습실에 남아 새벽 5시까지 연습을 하고 자취방으로 귀가해서 3시간 정도를 자고 다시 오전에 영어 공부를 하고 이런 생활을 반복했다. 우리 대학교에는 새벽 3~4시쯤 멕시칸 청소부 아저씨가 학교를 전체를 돌면서 청소를 한다. 난 이 아저씨의 존재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음악학부 학생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이 글은 내가 얼마나 치열하게 열심히 살았는지를 자랑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그 시절 나는 친구들과 같이 살면서 월세를 쉐어 하고 있었는데 학교에 있는 시간이 더 길다 보니 집세 내는 것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생활한 지 5달째 내가 열심히 한다는 것을 인식한 것 일까? 음학 학부 총장이 연습실에 가장 먼저 오고 가장 나중에 나가는 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지 나를 불러 얘기를 했다. "너의 기타 소리가 매일 내 사무실에 들린다." 내가 전공으로 택한 악기는 기타였다.

총장은 연습실 열쇠를 주며 얘기했다. "앞으로 너가 연습실 문을 열고 닫고 할 수 있도록 키를 줄 태니 연습실이 문 열리기 기다릴 필요 없다." 덕분에 나는 더 자유롭게 연습을 할 수 있었다.

대학교 2학년 1학기에 나는 군대를 가기 위해 휴학을 내었고 결국 입대를 하게 되었다.

나는 이 떄만 해도 피해의식이 너무 컸다. 나는 대학 생활 동안 내 시간을 허투루 쓴 적이 없어서 인지 내가 그동안 연습했던 기타 실력이 사라질 까 봐 너무 불안했고 내가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너무 커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당시 군악대 경쟁률이 너무 강해 대학에서 처음 음악을 시작한 나에게는 장벽이 너무 컸다.)

어떻게 잘 적응해서 군복무 시간을 다 채울 때쯤 나는 내 나름대로 학업 및 미래 계획을 해놓고 사회로 나왔고 미국으로 다시 복학하기 위해 여권 비자 연장을 하려 대사관에 갔지만 왜 인지 대통령이 트럼프가 된 이 후로 비자 연장을 받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4번을 더 찾아갔지만 연장을 할 수 없었고 학교에서는 빨리 복학을 하지 않으면 중퇴할 수 있다는 통보가 왔다, 그렇게 나는 졸지에 고졸이 되었다.

지금이야 그게 뭐 별일이겠거니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스트레스로 살이 빠지고 있었는데 이때 왜 최고의 다이어트가 스트레스 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거의 2달이 안되는 시간 동안 20kg가 빠졌다. 이러다가 죽을까 봐 일부러 자기 전에 매일 치킨을 한 마리 먹고 자는데도 다음날 1kg가 빠지는 현상도 체험했다. 덕분에 주위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내가 죽을 까 봐 밥을 사주는 일이 많아 밥값이 많이 안 들어서 좋았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 후...."

그렇게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이 희미해져 갔다.

[내 나이 25 다시 제자리로 가야 하나? 아니면 다른 길?]

나는 군 복무를 위해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입대를 두 달 앞두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부터는 자잘한 부분까지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았는데 전역을 하고도 이 부분은 변하지 않았다. 내가 오로지 부모님께 도움을 받는 것은 잠자리를 제공받는 것뿐이었다. 집에서 밥을 먹는 것부터 입는 옷 통신비 교통비 등등 부모님은 나를 하숙생이라고 부른다.

(웃음)

그래서 나는 이제 돈도 없고 미래 계획도 잃은 시점에서 돈도 없으니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단 나는 일을 할 때 나 스스로 조건이 있었는데 최대한 다양한 일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나라 정서상 일을 짧게 짧게 때려치우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서 일 구하는데 조금 애를 먹긴 했지만 그것도 이후에는 나름의 요령이 생겨서 일을 구하는 건 수월했다. 덕분에 나는 지금 까지 일한 것들에서 겹치는 부분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곤지암 리조트 골프장 레스토랑과 리프트 안내원, 내시경 센터, 가로수길 옷 팔이, 강남에서 신발 팔이, 신촌과 용산 카카오프렌즈 스토어에서 인형 팔이, 법률사무소 마케터, 온라인 쇼핑몰, 등등 더 쓸 수 있지만 너무 길어져서 생략하겠다.)

그렇게 내가 방황하면서 돈을 모으는 재미보다 쓰는 재미를 더 느끼는 바람에 나는 돈을 모을 수 없었다. 경제관념도 없었고 금융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 었던 것 같다. 그렇게 그냥 하루하루 일한 돈으로 영화를 한 편 보고 나오는데 내 동갑내기 사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너 뭐하고 샤냐?" 이 사촌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고3 때 수능 이후 연도 별로 계획해 놓은 10년 치 계획표를 보고 감명을 많이 받은 친구였는데 내가 현재 이렇게 방황하고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아이러니하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때 뭔가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나는 다시 기타를 잡기로 했다.

우리 집은 내가 7살쯤 서울로 이사 온 이후 서울을 벗어난 적이 없다. 우리 집이 잘 살아서 라기보다는 부모님이 자식을 잘 키우려면 좋은 동네에 있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 었던 것 같다.

우리 집안은 자가로 된 집이 없어서 전세 계약으로 2년마다 이사를 다녀야 했는데 나는 이게 너무 싫었다.

내 나이 25 우리 집에는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사 갈 전셋집을 아버지가 인터넷에서 싸게 나온 매물이 있다면 덜컥 계약한 것이었다.

이 집은 반지하였지만 나름 넓어서 좋았다. 문제는 그때가 장마철이 었는데 폭우가 내리던 날 우리 집은 물에 잠겼다.

이 때문에 우리는 당장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야 했고 서울에서는 이사 갈 수 있는 상황이 안되어서 지방으로 이사 가게 되었다.

[내시경 센터와 강남 기타 학원의 빈부격차]

나는 다시 한국 음대 입시에 도전하기로 했다.

나는 대학을 다닐 때 나를 가르치는 강사가 너무 못 가르쳐서 한국에서 기타를 가장 잘 가르치는 사람을 찾았고 그 학원은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1시간 이상 떨어진 서울에 있었다. 문제는 학원비가 너무 비쌌다는 것이었다. 부모님께 손을 잘 벌리지 않고 살아온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이 당시 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이 아버지는 H대기업을 다니고 있었는데 나이가 50 후반대가 다 돼가자 회사에서는 봉급을 줄여 자연스럽게 퇴사하도록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나는 학원비 절반 정도를 도움받을 수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내가 아르바이트로 충당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그 학원을 다니게 되었는데 결론만 얘기하면 매우 힘들었다. 나는 내 입시 연습 시간을 더 벌기 위해 부모님께 도움을 조금 받았지만 체력적으로 시간적으로 너무 역부족이었다. 그곳에 어떤 친구는 무역회사 회상의 아들도 있었고 준재벌 급의 자제들도 다니고 있었는데 그 친구들 중 어떤 친구는 레슨 시간을 재끼고 나갔는데 그 사유가 건물을 상속받아야 해서 도장 찍으러 나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당시 내시경 센터에 아침 7시부터 오후 1시까지 전쟁같이 일을 하고 학원으로 바로 직행해서 레슨을 받는 상황이었고 기타를 하는데 필요한 장비들을 중고로 사는 것도 손이 떨렸는데 그 친구들은 자신의 차와 건물 고가의 악기들을 새 걸로 몇 대씩 사는 모습과 나를 보며 나는 뭔가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휩싸였다.

[내 꿈을 포기하게 한 돈이 무엇 인지 알아야 했다.]

나는 아버지한테 죄송했지만 음악을 하는 것을 포기하겠다고 얘기했다. 그 당시 아버지는 가벼운 접촉 사고로 목발을 집어야 했던 상황이 었는데 회사에서는 그런 아버지를 일부러 이 기회에 자진 퇴사하게 만들려고 다리 다친 상황을 이용해 대중교통으로 회사를 다닐 수 없는 곳으로 발령을 보냈고 아버지는 결국 퇴사하게 되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내게 돈이 필요한 건 맞지만 막연히 취업이 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느 곳에 취업을 하든 그 곳에서 결국엔 나와야 하거나 버려질거라면 차라리 지금 부터 작던 크던 스스로 돈을 만드는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까지 경제지식 금융지식 하나 없이 음악만 했던 나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도 이 계기로 내가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내 마음 속에 깊이 박혀있었다. 그렇게 막연한 마음으로 나는 무작정 집 근처 도서관을 방문해서 돈과 관련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내가 그 날 처음 읽었던 책이 기억난다. 멘큐의 경제학을 읽었는데 너무나 당연하지만 책 읽는 속도는 미친 듯이 느렸고 이해도 안되고 기억도 잘 남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몇일 흐르고 운이 좋게도 서울에 재개발 예정 구역이라 싸게 매물이 나온 곳이 있어서 우리 가족은 다시 서울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나는 당시 현금이 없어서 어떤 일이라도 해야 했는데 마음 한켠엔 사업이 있었기에 기왕이면 내가 사업을 할때 쓸 수 있는 기술을 배울 수 있으면서 돈도 벌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전 재산을 사기 당한 아버지]

나는 내가 살면서 가난하지는 않았어도 재난 영화나 불우이웃 돕기 캠페인에 나오는 상황에 우리 가족이나 내가 처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고 이건 다른 사람들한테만 일어나는 일일거라 생각했다.

근데 이런 일들을 겪어보니 참 돈이 없이 행복을 논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은 이러했다.

우리 아버지는 퇴사를 하고 가지고 있던 목돈이 있었다. (사실상 현금성 재산의 전부였다.)

그런 우리 아버지를 눈여겨 보던 아버지의 후배가 아버지를 꼬득여 동업을 재안 했고 그 조건은 투자였다. 과정은 생략하고 결국 그 사기꾼에게 아버지의 돈이 뺏기게 되었다.

이런 상황들은 나를 더더욱 부를 갈망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티탄의 도구인가?]

나는 당시 필립 코틀러의 마케팅 책 부터 인스타 그램 마케팅 등등 마케팅 관련 서적을 읽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 본 내용들을 바탕으로 면접을 보러 다녔다. 처음에 일을 구할때 생각한 것은 부자들이 많은 곳에서 일을하자는 생각이 있어서 근무지를 압구정 가로수길로 지정해서 일을 찾기 시작했고 나는 그곳에서 그 당시 잘 나가던 피우는 비타민스틱을 파는 가게에서 일 할 수 있었다.

그 가게의 브랜드는 본사가 여의도에 있었고 스타트업 기업이었다. (내가 보기엔 그랬다.)

그 가게에서 나는 일을 하면서 회사가 언론에 보도가 되고 커가는 모습들을 지켜 볼 수 있었다. 덕분에 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지만 가게 사장과의 마찰로 일을 그만 두게 되었고 당시 인스타 그램 마케팅 책과 유료 강의를 듣고 있었는데 실무에는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 궁금해서 집 근처에 관련된 일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법률사무소 마케팅 팀에서 인스타그램 마케팅을 할 줄 아는 신입을 뽑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면접을 보러 갔다.

나는 내가 책과 강의에서 보았던 지식들을 토대로 면접을 이어갔고 이는 출근으로 이어졌다. 나는 분명 내 실력을 검증하고 성장해보고 싶어서 들어왔지만 내가 그곳에서 했던 것은 인스타 그램이 아닌 네이버 블로그 마케팅이었다. 나는 퇴근 후 개인적으로 포토샵을 배우고 있었는데 포토샵을 회사에 근무시에 사용할 일이 많아 포토샵 스킬이 좀 많이 늘었었다.

나는 어느새 인스타그램에 대한 목표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일을 한지 두달째 나는 여기서 블로그 상위노출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이제 제법 그것을 하는게 익숙해졌다. 나는 뭔가 흥분이 되었다. 이걸로 내가 어떤 사업을 하든 도움이 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이걸 검증해보고 싶었다.

나는 블로그 상위 노출 기술을 취미로 기타를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모으는데에 써보기로 했다.

나는 굉장히 보수적인 편이라 내 얼굴이나 내 정보가 누군가에게 드러나는 것을 꺼려했기에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내 전화 번호를 모르고 얼굴을 보지 않고 사업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 결과 나는 내 전화번호를 사용하는 대신에 카카오톡 비즈니스 계정을 만들었고 내 프로필 사진을 쓰는 대신에 포토샵을 배웠던 스킬로 로고를 만들었다. 그 이후 블로그를 계설하고 그곳에 내 기타레슨을 홍보하고 카카오 1대1 채팅으로 연결되는 이미지를 제작하여 첨부했다. 결과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조그만 돈으로 부를 늘려보자?]

나는 내가 세운 가설들을 검증해보이기 위해 시도했던 기타레슨 홍보가 수익으로 이어지는 것을 확인 했고 나는 다니던 회사를 때려쳤다. 나는 그 당시 돈에 관한 책들을 계속 보던 중이 었는데 내가 보던 책들에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강조 했었다. 수익 자동화 라고 보면 편하겠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게 내가 레슨을 해서 버는 것 보다는 나 처럼 레슨으로 돈을 벌고 싶어하는 직원들을 모아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실제로 나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음대입시 중도에 기타를 포기한 나 같은 사람도 레슨으로 돈을 버는데 이런 기술을 전문가들이 혹은 전공생들이 알고 있으면 훨씬 유용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래서 질 좋은 레슨을 원하는 수강생과 수입이 필요한 뮤지션들을 이어주는 중계업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능력있는 강사를 모으는게 우선이라고 생각했고 어떻게 나 따위가 이런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나의 사업 아이디어는 어느세 커져 뮤지션들이 일하고 싶어하는 음악교육 스타트업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되어 있었다.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포토샵 스킬과 말빨을 이용해 홍보 포스터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뮤지션들이 드나들만한 커뮤니티 사이트에 홍보물을 올렸다.

그리고 그 홍보물에 내가 미리 새롭게 만들어 놓은 oo아카데미 블로그와 이어지는 링크를 달아 놓았다.

블로그를 개설하고 홍보를 한지 하루만에 순 방문자가 1천명이 넘었다. 이 블로그는 심지어 상위 노출은 커녕 게시물이라고는 내가 커뮤니티에 올려놓은 홍보물을 복사해서 올려놓은 것 하나 뿐이었다.

나는 기존에 내가 레슨생을 모집했던 것 처럼 카카오 비즈니스 채널을 하나 개설을 했고 이곳으로 강사들의 면접을 진행했다. 당연히 악기 레슨이라 이 사람들의 실력을 평가할 실기 영상을 받고 오디션을 진행하기로 했다. 문제는 생각보다 지원자들이 너무 많아 혼자서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생각했다. 나랑 같이 일한 동업자를 뽑자.

[동업 +1 = 친구 - 1]

원래 기존에 내 사업을 같이 하기로 한 친구가 있었다. 문제는 그 친구가 내가 보기에 일을 너무 안한다는 것이 었다. 그렇게 서로에 대한 오해로 갈등이 생기고 일에 진전이 안되는 것 같아 그 친구와 자연스럽게 연락을 끊게 됐고 결국엔 나 혼자 생판 모르는 사람을 동업자로 앉혀도 이거보다는 상황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동업자를 한명 새로 뽑게 되었다. 결과는 내 예상이 맞았다. 새로 뽑은 친구는 일에 더 욕심이 있었고 당연히 일에 진전이 더 생겼다.

새로 뽑은 친구에게 나의 비젼을 제시했고 지금 상황을 솔직하게 전달했다. 지금 당장 급여를 줄 수는 없다. 나도 급여가 없다. 다만 이 스타트업을 키우고 누군가 이 회사를 거액에 사간다면 지분을 같이 나누는 조건으로 같이 일하는 건 어떻겠느냐. 그 친구는 승락을 하였고 그 친구와 같이 우리 스타트업에 지원한 강사들을 만나며 2대1 면접을 진행하러 다녔다. 여기 까지만 보면 진짜 이제 뭔가 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둘이서 밤낮 없이 블로그로 우리 아카데미를 홍보하는 글을 쓰고 우리 스타트업에 지원한 강사들의 이력을 정리하고 검토하고 미팅하고 하는 시간들을 가졌는데 문제는 그 과정이 너무 고되다 보니 같이 동업하기로 한 친구가 넉아웃이 되어 나가 떨어지게 되었다.

그것과 상관없이 나는 계속 이 사업을 진행 할 수도 있었겠지만 왜 인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것이 아마 핑계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당시 그 친구와 함께 강사님들과의 대면 면접을 가졌고 그 과정에서 우리 스타트업에 들어오겠다고 한 강사들을 결국 내세울거라고는 우리 얼굴밖에 없는 이 스타트업을 믿어 주었다고 생각했기에 결국 그 친구와 내 얼굴이 이 스타트업의 마스코트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중 한명이 나가버린다면 이제 막 시작한 스타트업에 들어온 강사들이 혼란을 겪을 것 같았기 떄문이다.

그렇게 결국 내 나이 29 그 스타트업은 지원해준 모든 강사들에게 동업자가 그만두게 되어 이 일을 중단하게 된다는 안내메세지를 보내며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현재 나는 인천 송도에 와있다. 이곳에서 나의 서른 살을 만나게 되었다.

이후 나는 내가 창업과는 맞지 않는 것인가? 생각 하게 되었고 나 역시 맥이 빠졌다. 현재는 다시 창업에 대해 내가 놓친 부분을 책을 통해 공부하고 있고 동시에 지금 같은 시대에는 투자를 때어 놓고는 삶을 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무엇이 되었든 간에 투자를 현명하게 하는 방법을 공부하고 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다. 이 글은 제목 처럼 성공 글이 아니다.

그저 나도 가끔 내가 무의식 중에 내가 걸어온 길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아 10년이 지난 시점에 다시 한번 내가 지나온 발 자취를 돌아 볼겸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는 차원에서 쓰는 글이다.

사람마다 내 글을 읽고 느끼는 것이 제각각이 겠지만 내 글을 통해 느낀 점이 있길 바란다.

"나 생각보다 나름 발악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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