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25-26 : 강릉

210525-26 : 강릉

5월이 시작될 즈음, 대학 신입생 시절부터 함께해온 친구에게 연락을 해보니 이달을 끝으로 다니던 회사를 퇴사한다고 전해왔다. 퇴사를 하고 나면 기꺼이 내가 사는 곳으로 찾아올 테니 한번 죽어보자고 했다. 근래에 술을 많이 하지 않는 나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어쨌거나 알겠다며 일단락을 짓고 지내고 있었는데, 24일에 퇴사를 했으니 한번 보자고 연락이 왔다.

나 또한 자영업자로 일하고 있으니 스케줄 조정에 어려움이 없어, 그럼 내일 점심 나절에 일찌감치 만나 한잔하자며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친구랑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언제 여행을 갈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전화를 걸었고 괜찮으면 내일 떠나자고 권했다.

이 친구와의 지난 여행은 16년, 영덕이었다. 이번에는 어디로 갈까 하다가 울진이나 강릉으로 후보지가 좁혀졌고, 친구의 의견에 따라 강릉으로 정해졌다. 강릉은 나 또한 여태껏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속초나 울진, 영덕으로는 이따금씩 떠났지만 강릉을 피했던 이유는 단순히 사람이 많아서였다. 생각해보면 늘 한적한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속초에도 처가에서 마련해둔 리조텔이 없었다면 갈 일이 없었을 것이다.

30대 남자들의 여행은 단순할 수밖에 없다. 관광이 목적이라기 보다는 어디 좋은 데 가서 '술이나 한잔' 하자가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릉까지 가는데 술만 마시기 뭐하니 중간에 오죽헌을 들려봤다. 입장료 3천 원씩 내고 들어가니 아주 쾌적하고 거닐기 좋은 공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친구는 다른 친구들과의 모임을 갖으면 족구나 하다나 술이나 때려 넣기 일수인데, 나와 함께하면 이렇게 관광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평소에도 나는 여유가 있다면 산책하거나 꽃과 풀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어딘가 여행을 가면 늘 박물관이나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공원들을 으레 방문하곤 했었다.

이십 대 중, 후반까지만 해도 고데기로 머리를 피지 않으면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았다. 곱슬머리가 상당히 지저분하게 느껴졌기 때문인데, 요즘에는 파마 한셈치고 앞머리와 옆머리 정도만 깔끔하게 정리한 채로 다니기도 한다. 이날도 그랬다. 아침부터 부산스레 머리를 정리하지 않고 편한 마음으로 여행길에 나섰다.

장사를 시작하고 몇개월동안 마음이 편했던 적이 없다. 퇴직금으로 들고 나온 돈을 야금야금 까먹고 있었고, 버는 돈은 월급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탓이었다. 어쨌거나 꾸준히 일해온 결과 지금은 최소 생계비는 건지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니 여행이라는 소소한 여유를 부려볼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오죽헌 입구에서 조금 더 들어오니 넓은 공터에 흔들의자가 있어 냉큼 가 앉았다.

맘 편히 내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다. 근래에 고민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넌지시 풀어놓아보았다. 그리고 딱 녀석이 내놓을만한 말들을 들을 수 있었다.

오죽헌을 둘러보고 나와 매표소 바로 앞쪽에는 카페 몇 군데 중 뷰가 가장 좋아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사람이 없어 전세(?) 낼 수 있을 것 같아 들어갔더니 뒤이어 두 팀이 더 들어와서 조금 아쉬웠다. 작금의 코로나 사태와 더불어 주중에 여행을 한 연유로 관람객 자체가 많지 않았다. 또한 그래서 관광을 온 것이기도 하다. 코로나 시대 이전의 이곳은 어땠을까 짐작이 갔다. 사람들이 북적이며 왁자지껄 했을 것이다.

예약해둔 호텔의 입실 시간이 남아 앞마당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동기 K에 대해서, 또 다른 누군가들에 대해서.

입실 시간에 맞춰 호텔로 향했다. 내가 예약한 호텔의 객실은 트윈베드에 레이크뷰였다. 앞에는 경포대 바다가, 뒤에는 커다란 호숫가가 있는 특이한 지형구조였다. 1박 요금은 5만 4천 원으로 성수기 여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저렴한 가격이었다. 짐을 풀고 나는 잠깐 일을 했다. 평일에도 마음대로 놀러다닐 수 있지만 언제 어디서라도 할 일은 해야 하는 게 디지털 노마드다.

잠시 일을 마치고 곧장 나와 점찍어둔 가게로 향했는데 아직 오픈 전이었다. 우리는 경포대 해변을 잠시 거닐기로 했다. 이따금씩 머리를 식히러 바다를 향하고는 하지만 경포대 해변처럼 뻥 뚫려 있는 곳은 드문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1차로 점찍어둔 곳으로 향했다. 화니 조개구이라는 상호명으로 원하는 조개를 직접 선택해 무게를 달아 요금을 책정하는 방식으로 강릉 경포대 앞에서 유일하게 합리적으로 술 한잔 할 수 있을만한 곳이었다.

아직까지도 바다에 놀러 가면 '회를 먹어야지'라는 느낌이 있는데, 경포대 앞 횟집들은 다들 가격이 미친 것 같이 비싸게 느껴져서 구태여 회를 먹고 싶지는 않았다. 걔 중에는 블로그 마케팅에 돈을 엄청나게 쏟아부어 도배를 해놓은 업체도 있었는데, 모르면 몰랐지 알고서는 도통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역시 회는 수산 시장에서 떠다 먹는 걸로.

친구의 말 마따라 조개구이를 시작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회포를 다 풀기에는 시간과 정신(?)이 부족했던 것 같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도 나도 썩 좋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직 젋으니까 무엇이든 해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다음 여행은 언제가 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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